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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오프 더 로우: 에드워드 섹스턴

Photography: Jonathan Daniel Pryce


지금부터 이야기할 사람은 전후 새빌 거리 역사에서 핵심 인물 정도에 그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선도자 에드워드 섹스턴은 활기 넘치는 60년대 런던 패션의 최신 감각을 새빌 거리의 장인 정신 전통에 더함으로써 진부함을 떨쳐낸 테일러링계의 두 개성파 중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을 자신의 업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저희에게 일어난 일들을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해 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제 70대가 된 섹스턴이 말합니다. "많은 일들이 순전히 요행이었죠.”

요즘은 새빌 거리가 아닌, 메이페어를 가로질러 걸어가 나이츠브리지에서 Beauchamp Place의 앤티크 숍과 패션 부티크들 사이로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섹스턴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에 가 보면 톱 클래스 재단사들은 모두 1층에 아틀리에를 두고 있죠." 그가 인터뷰를 위해 자리에 앉으며 이야기합니다. "저는 고객이 직접 장인 정신의 살아 있는 현장을 볼 수 있는 쇼룸 작업장에 대한 믿음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섹스턴과 그의 동료이자 비즈니스 파트너였던 토미 너터가 런던의 병든 테일러링계를 되살릴 명약을 발견한 지도 이제 거의 50년이 되었습니다. “런던은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섹스턴이 회상합니다. 치명적으로 우아한 그의 코크니 억양은 극도로 세련된 주변 환경에도 전혀 빛이 바래지 않았습니다.  “킹스 로드, 카나비 스트리트, 록 스타에, 새로운 돈이 수없이 흘러들었죠...  하지만 돈이 있는 사람들도 원하는 만큼의 품질을 찾지는 못했죠.  특히 음악가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음악뿐 아니라 다른 방면에도 감각과 재능이 무척 뛰어났죠.  다들 더 좋은 품질의 옷을 갖고 싶어했습니다."

창업자 에드워드 섹스턴

섹스턴은 풀 드레이프 코트로 유명한 새빌 거리의 유명 테일러인 Kilgour의 하우스와 리젠트 가의 Harry Hall에서 테일러링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그곳은 라이딩 재킷, 해킹 재킷, 승마 바지, 조드푸어즈 등 승마복을 만드는 하우스였기 때문에 저는 긴 길이의 멋진 플레어 재킷을 좋아하게 되었죠." 영국 록 음악 왕족들의 패션이 되었던 스타일 감각에 관해 그가 이야기합니다. “저는 30년대와 40년대 낭만주의 시대에도 늘 관심이 있었습니다.  핀 칼라, 탭, 두드러진 숄더 라인 등 모두 멋진 룩이죠.  저는 그것들이 모두 좋았습니다.” 

영국 테일러링계에 혁명을 일으킨 우정은 섹스턴이 벌링턴 아케이드의 Donaldson, Williams and Ward에서 커터로 일하게 되었던 1967년에 시작되었습니다.  "토미는 하우스의 판매원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그가 회상합니다. “저희는 일을 마치고 맥주를 마시며 스타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둘 다 무척 좋아했던, 평균보다 길고, 허리가 잡혀 있고, 플레어가 들어간 이 룩을 생각하게 되었죠.”  그러던 어느 날 너터는 테일러링 회사를 시작할 자금의 지원(컨소시엄 중에는 실라 블랙, 비틀즈와 일하는 피터 브라운이 있었다)을 제안받았다고 섹스턴에게 이야기했고, 두 사람은 1969년 2월 14에 Nutters of Savile Row를 열었습니다. 새빌 거리에 120년 만에 처음 생긴 새 하우스였습니다. 

섹스턴은 너터와의 협력 관계를 “짜릿했다”고 표현합니다.  "어떤 사업이든 탐색하는 사람, 관리하는 사람, 갈리는 사람이 있어야 제대로 돌아가죠.” 그가 말합니다. “토미는 탐색하는 사람이었어요. 아주 사교적이었고, 인맥이 탄탄했죠.  저는 관리하는 사람이자 갈리는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네요.  작업장을 운영했고, 커팅을 했고, 피팅을 했습니다.”  곧 문화계의 유명 인사들이 그들을 찾아왔습니다.  "비틀즈, 엘튼 존, 믹 재거, 비앙카, 요코, 존 레논이 마치 클럽처럼 드나들곤 했죠... 초기에 사업을 번성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루퍼트 머독, 케리 패커, 폴 햄린 경 등 재계의 거물들도 많이 상대했죠. 저희는 고객층이 무척 다양했습니다.  모두들 신선함과 젊음이 느껴지는 옷을 원했죠. 그때는 그들도 젊었으니까요.”

이와 같은 유명 인사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미디어의 관심도 끌어들였습니다.  “갑자기 새빌 거리에 언론사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죠. 저희의 책임이었어요.” 그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곧 주변의 하우스들이 그들을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는 윈도우 디스플레이를 했었는데, 당시에는 새빌 거리 그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것이었어요. 쓰레기통에서 나와 아름다운 옷들 사이를 기어다니는 박제 쥐를 가져다 놨었죠...  그 밖에 또 저희가 아는 것으로는, 새빌 거리의 다른 하우스들이 유리창 안의 커튼을 떼고 마네킹으로 교체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들이 바뀌기 시작했죠.” 섹스턴과 너터는 여성복을 만드는 것으로도 관습에 저항했습니다(섹스턴은 이후 스텔라 매카트니와 콜라보레이션했다). 당시에는 전례 없던 일이었으며, 레논과 오노의 점프수트도 물론 새빌 거리의 눈총을 받았습니다. 

“비틀즈가 Abbey Road 앨범 커버에서 저희가 만든 수트를 입고 길을 건넌 일이요, 이런 수준의 광고를 누가 기획할 수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섹스턴은, 두 사람에게는 세계 제일의 유명 남성복 거리를 개혁할 생각이 결코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대중적으로 엄청난 유명세를 얻은 그 일(“비틀즈가 Abbey Road 앨범 커버에서 저희가 만든 수트를 입고 길을 건넌 일이요, 이런 수준의 광고를 누가 기획할 수나 있었겠습니까?” 그 모든 일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으며 그가 이야기합니다.)을 포함해  섹스턴과 너터가 했던 모든 혁신은 계획에 없던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두 남자가 이룬 성공의 비결이 오로지 행운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섹스턴과 너터는, 그들의 옷을 입은 사람은 대중 음악에 공헌하게 된다는 공식을 만들었고 이는 의복 문화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영국 테일러링 역사에 큰 부분을 차지하던 이 시기는 두 사람이 각자의 길을 떠난 1976년에 막을 내렸습니다. 

너터는 1992년에 49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지만 섹스턴은 거의 25년이 지난 지금도 내일을 바라보며, 하우스의 문을 닫을 기색이 조금도 없습니다. 디테일과 비례에 대한 그의 열정적인 눈은 언제나 날카롭고, 자신의 작업을 향한 굳건하고 끊임없는 사랑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원자재로 귀결됩니다. 그는 “메리노울은 테일러링의 재료가 모름지기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압니다”라고 말합니다. “회복력이 있어요. 비틀어도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죠. 저는 늘 메리노울로 작업하고 싶어요. 제게, 고객에게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성공적인 결과물을 보장해 주니까요.”

본인 작업에 쓰는 원자재의 개선에 관해서든, 새빌 거리의 정신을 60년대 후반 문화적 시대정신의 정상에 끌어올리던 빛나는 기억에 관해서든 섹스턴은 지칠 줄 모르는 직업 열정을 지닌 사나이입니다.  "저는 이제 74살입니다. 지금도 일에 있어서는 젊었을 때만큼이나 열정적이고 즐겁습니다.”

Edward Sexton, 26 Beauchamp Place, London, SW3 1NJ

스콧(Nick Scott): 리포트 (Robb Report)영국판의 에디터이며, 레이크 (The Rake)의 전 편집장, 지큐(GQ) 오스트레일리아의 부편집장이다. 그는 런던에 살며 에스콰이어(Esquire), 가디언(The Guardian), 파이낸셜타임스(The Financial Times )에 특집 기사를 실기도 했다.